우연히 칼훈의 쥐 실험을 알게 됐다.
관련 내용은 링크로 갈무리 하고, https://lakuworld.tistory.com/284, 문득 이런저런 생각이 오르고 내려서 일단 두서없이 적어본다. 결론도 없고 어쩌면 의미도 없을지도 모르는 정말 그냥 떠오르는 생각들의 나열이다.
결국 공간을 누가 더 많이 갖느냐. 이것이 경제, 정치사회, 문화에서 발생하는 싸움이다. 더 큰 공간은 권력이자 부를 뜻한다. 공간은 즉 파이와 같다.
파이의 확장은 단순히 경제의 개념에서 뿐 아니라 정치.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도 매우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인간사회는 경쟁이 필연적인데 한정된 파이는 경쟁이 상대방의 것을 빼앗아 오는 형태의 경쟁이 된다. 다만 안타깝게도 정치와 사회는 한 국가의 영토를 넘어서기 어렵다. 넓게 보아도 결국 지구를 넘어서기 어렵다. 따라서 정치 사회의 갈등은 자칫 극단적으로 흘러갈 수 있다. 하지만 경제와 문화는 국토를 넘어서 확장이 가능하다.
정치 사회의 갈등은 계속해서 존재한다. 단 사회적 합의가 있다면 이들의 갈등은 최소화 될 수 있다. 이후는 다른 국가와의 갈등이다. 정치 문화는 보통 하나의 국가에 한정되어 있어 파이의 확장이 어렵다. 더 어려운 것은 이들은 보통 믿음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 믿음은 이(理)와 달리 쉽게 바뀌지 않는다.
경제 역시 갈등이 존재하지만 파이가 커진다면 남의것을 먹는 싸움보단 새로운 파이를 갖기 위한 경쟁을 하게 된다. 문화 역시 갈등이 존재한다. 하지만 문화는 믿음을 제외한 나머지 영역에선 무한히 확장 가능하기에 문화적 다툼은 많지 않다.
정치 사회와 문화 그리고 경제는 서로 연결이 되어있다. 따라서 독립적이지 않다. 정치 사회의 불안정은 문화와 경제에 영향을 미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임계점이다. 임계점을 넘어서면 도미노처럼 다른 영역도 무너트린다.
정치 사회는 아직은 한 국가의 영토 안에서 영향을 미치기에 사회적 합의가 없는 경우 계속 불안하고, 계속된 정반합의 움직임이 나타난다. 문제는 합 즉 합의를 찾아내지 못할 때 그리고 경제와 문화에서 불안과 다툼이 커질 때 갈등해결이 어렵다.
합은 관용이고 인정이고 이해다. 理와 다르다. 이성은 남을 자르고 가르고 평가한다. 따라서 합을 이루기 위해선 이성을 뛰어넘는 관용과 이해의 감성이 필요하다. 양극화의 문제는 합이 필요한데, 이를 이성으로만 해결할 수 없다. 문제는 정치 사회의 파이는 한정적이라 합을 찾기가 매우 어렵다. 그럼에도 정치 사회가 합을 찾을 방법은 관용이고 인정이고 이해다.
추세라는 것이 존재한다. 관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작용반작용의 법칙도 인간사회에서 똑같이 적용이 된다. 이 작용반작용의 법칙은 관성에 의해 어떤 임계점을 넘어서기 전까진 크게 작용하지 않는다. 문제는 자칫 반작용이 추세가 되어버릴 때이다. 이는 합의점을 찾기 어렵게 한다. 공격적이다. 때론 자신의 살을 깎아 먹기도 한다.
한정된 파이를 두고 싸우는 상황이 도래하면 공격적 성향이 증가하게 된다. 단순히 경쟁자들간의 싸움 뿐만이 아니라 협력자들 간 싸움도 증가하게 된다. 이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악해서 혹은 선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함이고, 또 상대방을 전적으로 믿지 못해서 그런다. 신뢰는 쌓는 것이지 갑자기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요즘 사회의 통합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내 평생을 돌아봐도 남녀, 노소, 이념, 지역간 갈등이 현 정권만큼 커진 기억이 없다.
이념의 갈등은 김대중 대통령이 전두환을 용서하면서 아무는듯 했다.
개인적으로 노무현 전대통령을 꽤나 좋아하지만 그분의 마지막은 매우 아쉽다. 그 마지막이 결국 적폐라는 단절의 시작이 되어버렸다. 진보와 보수의 극렬한 싸움. 이 시작의 씨앗은 노전대통령의 마지막을 바라본 진보의 분노에서 시작됐다고 나는 본다. 이 분노는 이해된다. 논두렁 시계에서 논두렁을 제외하면 시계는 사실이다. 하지만 논두렁이라는 쓸대없는 말을 붙여 자존심 강한 노전대통령을 사지로 몰았다. 또 명박이의 노전대통령 수사는 본인의 정치적 돌파구로써 이뤄진 점도 있다고 나는 본다.
문제는 노전대통령을 지지했던 이들의 분노를 이용하는 쓰레기들이 존재하는 점이다.
문재인은 적폐청산을 외쳤다. 하지만 적폐청산은 합을 이뤄내지 못한다. 적폐청산은 오직 정반합(작용 반작용 합)의 반, 즉 반작용만 존재할 뿐이다. 작용과의 합은 적폐청산으로 이루지 못한다. 반작용 만으로 합을 이뤄내려면 작용을 지워내는 수 밖에 없다. 이는 현 탈레반 세력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들 근본주의자들은 합을 보일 생각이 없다. 이들이 말하는 합은 기존의 유연한 무슬림을 지워내고 근본주의로 돌아가는 것이다. 즉 반작용이 적폐청산을 외치면 기존 작용을 지워내는 방향으로 합이 발생한다. 이는 현재 한국에서 발생하기 어렵고, 발생해서도 안된다. 이는 공산주의로 회귀이자, 사회주의 집단주의로의 회귀다.
나 자신도 이렇게 합이 필요하다면서 문재인을 많이도 욕했다. 합을 이루고자 한다면 문재인을 적폐시 하면 안된다. 비록 내게 매우 강한 의심과 분명한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문재인과 똑같이 한 집단을 혹은 한 사람을 적폐로 몰아가면 합을 이뤄내지 못한다. 지금 나는 문재인을 그리고 그 지지자들을 적폐시 하고 있다. 나 역시 바뀌어야 한다.
사실 보수고 진보고 진실된 정치인은 매우 적다. 정치 근처에 가서 저들이 하는 짓거리를 1달만 봐도 일반 국민들이 얼마나 바보 같은지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정치를 위해 가치를 빌려오고 사용하는 쓰레기 수준이다.
이런 쓰레기 정치꾼들보다 더 큰 문제는 매우 편향된 지지자 집단이 극소수의 진실된 정치인들 마저도 쓰레기통으로 내몰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엔 정치꾼들이 문제였지만 지금은 편향된 지지자 집단들 역시 매우 큰 문제다. 더 재미있는건 이 지지자들을 김어준과 조선일보와 같은 편향된 언론들이 뒤에서 알게 모르게 조종하고 있다는 점이다.
남녀갈등도 페미 정치인들의 갈라치기도 이유겠지만 내 눈에 가장 큰 이유는 역시 공간이다. 즉 한정된 자리와 한층 높아진 경쟁 강도라고 이해하고 있다.
과거 여성들과 현재 여성들이 겪는 차별은 매우 큰 차이가 있다. 동시에 과거 남성들과 현재 남성들이 겪는 경쟁 강도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여성들의 지위는 계속해서 올라가고 있다. 난 이것이 사회적으로 좋은 방향이라고 본다. 문제는 바로 여기서 나온다. 여성들의 사회진출은 남성들에겐 더 높은 경쟁강도로 귀결된다. 이렇게 환경이 바뀌니 남성들은 더이상 여성들을 배려할 여유가 사라진다.
과거 여성들의 불합리한 사회적 차별로 남성들은 어떤 부분에서 암묵적으로 여성들을 배려했다. 남성들만 군대를 입대했고, 결혼을 할 때도 남성이 더 많은 재산을 가져가는 등 여러 면에서 남성들이 이 불평등에 대한 나름의 절충안을 찾았다.
물론 내 눈엔 여전히 여성이 불평등했지만 그것이 그 당시의 답이었다. 하지만 전 시대를 아우르는 진실과 답은 그리 많지 않다. 시대가 바뀌면 답도 바뀐다. 여성에 대한 사회와 남성들의 인식도 이에 맞춰 바뀌어야 한다.
난 현재의 남녀갈등은 결국은 사회적인 합의를 보아야 풀릴 것으로 본다. 여성과 남성의 사회적 평등은 반드시 보장되어야 하고, 사회적 평등은 공정한 경쟁을 통해서 이뤄져야 탈이 없다. 문제는 이 공정한 경쟁이라는 말이 꽤나 애매모호 하다. 바로 이 부분에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안타깝지만 정치인들 중 공정한 경쟁이 무언지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려는 인간이 한명도 없다. 모두가 다 오직 한쪽 편에만 서서 그들을 이용하고 그들의 표를 가져갈 궁리만 하고 있다. 이들 모두가 다 선정적이고 악의적인 구호만 내뱉고 있다.
출산율이 빠르게 하락한다. 이는 장단점이 공존한다. 개인적으로는 나와 내 아래 세대까지는 꽤나 어려운 시기를 맞이할 수 있다고 본다. 내수 소비력 하락과 연금 부동산 문제 등 여러가지 문제가 터질 수 있다. 하지만 이를 넘긴 후 더 긴 장기적인 시각으로는 오히려 현재의 인구감소가 국가엔 좋을 수 있다.
물론 칼훈의 쥐 실험과 같이 현재 추세가 계속 이어져 인구가 너무 줄어들면 문제다. 추세도 어떤 주요 지점을 넘기면 돌이키기 매우 어렵다. 칼훈의 쥐실험에서도 극렬한 경쟁 후 공간이 충분히 확보된 상황에서도 쥐들은 번식을 하지 않았다.
출산율 감소는 여러 요소들의 결과이고, 정부는 이를 규제나 정책 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부동산도 그렇지만 현재의 출산율 감소는 짧은 시간에 나타났다 사라질 태풍이 아니다. 장기간에 걸친 거대한 장마다. 이렇게 거대한 장마가 발생하면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이 없다. 이 땐 심리적인 부분이 먼저 개선되야 한다. 운이 좋다면 스스로 개선될 수 있다.
정부는 이 심리적 부분을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아마도 많은 정책적 실패가 있겠지만 그 실패를 통해서 배워가면 된다. 우리도 행동경제학과 같은 학문을 받아드리고 정책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국가적으로 연구를 해보면 좋겠다. 물론 이것이 과다해지면 또 다른 문제가 나타나겠지만..
코로나 이후 4차산업이 빠르게 진행될 것으로 예상한다. 4차 산업의 가장 큰 문제는 인력의 수요를 줄이는 것도 줄이는 것이지만 효율의 극대화를 주장하는 이들 기업의 시스템이다. 이는 결국 한정된 시장에서 극도의 효율성을 보이는 사람들만 이득을 보게 되는데, 이것은 결국 양극화를 다시 부른다. 단기적으로는 어떨지 모르겠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특히 플렛폼 기업들은 정부의 견제를 크게 받게 될 가능성이 크다.
사실 카카오는 삼성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정부의 입장에선 문제적 기업이다. 한국에서 정보 데이터를 독식하고 있고, 이를 이용해 전방위적인 산업군으로 문어발식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소프트웨어 기업의 특성상 기초자본이 제조업과 달리 크게 들어가지 않기에 문어발식 확장은 필연적이다.
시장경제의 선두인 미국에서도 antitrust law를 통해 독과점 구조를 인위적으로 깨트린 전례가 있다. 카카오 그리고 미국의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등의 거대 플렛폼 기업들은 코로나 이후 소득양극화가 크게 진행되면 가장 먼저 공격을 받게 될 기업들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반대로 제조기업은 앞으로 정부와 매우 가깝게 지내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양질의 직업군은 어느 정부라도 필요로 한다. 우리나라의 성장은 결국 단단한 제조업이 원인이다.
난 제조업과 서비스업 특히 it서비스업 사이에서 정부가 취할 입장은 시간이 갈 수록 분명해 질 것으로 본다. 조금더 지켜봐야겠지만 미국의 빅테크 기업들을 향한 반독점법 발의는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시장경제의 논리에서 자본이 있는 사람이 경쟁을 통해 시장을 독식하는건 나쁜게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일견 타당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시장경제의 진정한 핵심은 경쟁을 통한 혁신이다. 독점이 아니다.
물론 독점이 더 나은 경우도 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보통 이 때는 독점기업이 기업의 이윤보다 사회의 이윤을 더 고려할 때다. 이것은 자본의 논리와, 시장의 논리와 매우 다르기에 일반 사기업이 해내기엔 너무 어렵다.
과거 트럼프가 미대선에서 승리할 때 나는 세상이 확장에서 축소로 바뀌었다고 판단했다. 그 판단은 지금도 유효해 보인다. 코로나 이전까지 축소의 전초전이었다면 이젠 본격적인 축소가 발생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중국의 공동부유와 같은 정책들은 시장경제가 가진 부작용의 반작용이다. 이는 공산주의적 발상에서 나온 극단적인 반작용으로 이해한다. 문제는 미국을 필두로 한 자본주의 국가들이 내놓을 양극화에 대한 해결책이다. 만일 이 해결책이 중국의 해결책보다 못하다면 미중간 패권전쟁은 꽤나 길어진다.
확장도 무한하지 않고, 축소도 무한하지 않다. 한 추세의 끝엔 가속이 종종 보인다. 이번 코로나는 축소에 가속을 붙였다. 이 가속이 얼마나 유지되고 강하게 나올지 알 수 없다.
어제 오늘의 그냥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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